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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수업365

[1일 1페이지, 교양수업365]234 미술_오귀스트 르누아르

by 사랑반어린이 2025.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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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미술_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한가로운 경치를 그린 풍경화와 여자와 아이들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초상화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누아르는 열세 살에 부채를 장식하고 도자기에 꽃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면서 미술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을 모방하면서 실력을 쌓았고, 1861년에는 에코 데 보자르에 들어갔다. 1년 후 스위스인 샤를 글레르 교수의 화실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미래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리크 바지유를 만났다. 르누아르는 1874년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전통을 깨는 첫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 후 10년 동안 인상주의 원리는 르누아르의 화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물랭 드라 갈레트>(1876년)를 보면 그림의 구도가 임의대로 잘려서 그림 밖 세상과 그림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누아르는 <물랭 드라 갈레트>를 1877년에 열린 세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1878년에는 정식 살롱으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상류 사회의 부유한 인사들의 후원을 받았다. 금전적 계약에서 벗어나자 그는 폭넓은 여행을 시작했다. 1881년에 북아프리카로 갔고, 1882년부터는 이탈리아에 장기간 머물면서 라파엘로와 다른 고대 조각가들의 고전주의를 공부했다. 그것을 계기로 인상주의의 주관적 가치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가 이전에 가졌던 순간적인 색상, 변하는 빛, 느슨한 붓놀림에 대한 관심은 1883년부터 사라졌고 대신에 양감, 형식, 윤곽을 점점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초상화

 

르누아르는 1900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명성을 얻었지만 곧이어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1894년 류마티스 관절염이 발병한 후로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고, 1910년부터는 붓을 손에 묶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문제도 그를 괴롭혔다. 나중에 유명한 영화제작자가 되는 아들 장이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르누아르의 아내는 아들을 보러 병원을 다녀온 후 사망했다.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르누아르는 그림을 계속 그렸다. 70세에는 실험적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형상을 생각해 내면 본을 뜨는 일은 조수 리처드 기노가 맡아서 했다.

물랭 드라 갈레트 무도회
물랭 드라 갈레트 무도회

 

예술가로서 르누아르가 지녔던 생각은 그가 한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은 지상.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모습이다."

 

참고자료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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