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역사_존 브라운
존 브라운(1800년~1859년)은 적극적인 노예제 반대 운동가로, 1859년 노예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미국 버지니아주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완전한 실패였지만 사회운동 측면에서 보면 브라운의 시도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들의 결의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브라운은 그 지역 노예들이 주인에게서 도망쳐서 자신과 합류하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품고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버지니아주 하퍼즈페리에 있는 연방정부 무기고를 점령했다. 반란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고, 브라운은 며칠 만에 붙잡혀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브라운은 18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성장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급진파에 속했다. 1859년 대부분의 북부 사람들이 노예제도를 반대했음에도 브라운의 극단적인 전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포함한 많은 온건파들은 노예제도를 없애고 싶었지만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브라운이나 보스턴 출신의 대표적인 노예제도 반대 작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같은 급진파들은 노예제도를 가리켜 수용할 수 없는 도덕적 악이라 부르며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했다.
브라운의 반란은 군사적으로는 실패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겁에 질린 많은 남부 미국인들은 북부와 분리하는 것이 노예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1860년 선거에서 이기자 남부 주들은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그것이 결국 노예제도 폐지로 이어진 남북전쟁을 일으켰다.
브라운이 벌인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현대적 정의에 의하면 브라운은 엄연히 테러리스트이다. 하퍼스페리 사건이 벌어지기 몇 년 전 캔자스에서 일어난 작은 충돌에서 브라운과 그의 아들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일가족을 칼로 베어 죽였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당한 대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노예제도 폐지가 분명 브라운의 테러 행위 덕분이기 때문이다.
공화국 전투찬가
출처: 유튜브 <장강이>
브라운은 엄격한 기독교인 아버지 밑에서 코네티컷과 오하이오에서 자랐다. 그의 노예제도 반대는 분명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교수대에서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나 존 브라운은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이 땅이 지은 죄가 결코 깨끗이 씻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허망하게도 나는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도 그것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혼자 착각했었습니다."
남북전쟁 동안 북군 병사들은 <존 브라운의 시체>라는 행진가를 불렀다. 보스턴의 노예제도 폐지론자 불리아 워드하우는 그 노래를 듣고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 그녀의 노래 <공화국 전투찬가>는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애국적인 노래 중 하나이다.
참고자료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수업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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