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유아 발달_현실을 이기는 힘, 상상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 없다. 부모가 보기에는 매사 제멋대로 사는 듯 보여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세 가지 뿐이다. 부모가 시키는 일,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놀이 그리고 부모 말 안 듣고 고집 부리기. 아이들은 권한도 능력도 없기에 현실을 답답해 한다. 그렇다고 현실이 금방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기대는 것이 상상이다. 상상은 아이의 소망을 이루게 해 주고 불만을 견디게 한다. 상상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장수탕 선녀님
목욕탕은 아이들에게 이중적인 공간이다. 냉탕에서 수영도 하고 넚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장난을 칠 수도 있지만 결국 부모에게 잡혀서 꼼짝없이 때를 밀어야 한다. 욕탕 내에 가득 찬 습기는 숨이 막히고 타일로 덮힌 벽은 작은 틈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목욕탕이야말로 아이들이 느끼는 현실의 답답함을 은유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답답한 현실에서 덕지는 상상 세계로 넘어가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스스로 선녀라고 이야기 한다. 선녀는 하늘로 오르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서인지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장수탕에서 살고 있다. 어떠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이 할머니는 전신이 나간 할머니일지 모른다. 하지만 덕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그리고 할머니와 신나게 논다.
우리는 욕심과 조급함 때문에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어렵다. 덕지의 행동을 통해 아이들도 하는 것을 우리들 부모는 못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백희나 그림책의 매력은 그가 그려내는 상상이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있다. 옛날 옛적을 배경으로 하지도 않고, 추상적인 공간을 상정해 이야기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이곳의 아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 상상의 이야기를 펼져간다. 물론 이야기는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내용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그뿐아니다. 백희나가 현실의 틈을 벌려 열어젖힌 상상의 문을 통해 아이들은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소망을 상상 속에서 이뤄 낸다. 이것은 아이는 물론 어른도 공유할 수 있는 본능적 욕구다.
눈사람 아저씨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아이는 눈사람을 만든다. 제 키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고는 모자를 씌워 주고 목도리를 매 준다. 눈, 코, 입도 정성껏 만든다. 아이는 스스로 만든 작품에 뿌듯하다. 이윽고 밤네 되었지만 아이는 온통 눈사람 생각이다. '잘 있을까? 추운데 괜찮을까?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래서 문밖을 내다본 순간 놀라운 일이 시작된다. 눈사람이 모자를 벗고 아이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아이는 눈사람을 집 안으로 데려와 집을 구경시켜 준다. 거실과 욕실, 안방을 눈사람에게 집 안 물건의 사용법을 알려 준다. 벽난로나 가스 불에는 깜짝 놀라지만 냉장고의 냉기는 무척 좋아하는 눈사람은 호기심쟁이에다 장난꾸러기다. 아빠의 옷도 입어 보고, 두루마리 휴지로 장난도 친다. 구경을 마친 둘은 거하게 음식을 차려 밤참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눈사람이 아이를 안내할 차례다.
아이들이 만드는 눈사람이 상징하는 대상이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아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못한 친구, 자기 자아의 약한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수동적이고 여러모로 부족한 눈사람을 만들어 내며 아이들은 역으로 자신의 유능함을 확인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든 물건을 만들든 그 시기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존재를 담아내는 경향이 있다. 눈사람을 만들때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필요한 아이는 친구 눈사람을, 엄마가 필요한 아이는 엄마 눈사람을 만든다.
레이먼드 브릭스는 이 그림책에 글을 넣지 않았다. 다만 만화처럼 작은 구획을 나누어 많은 장면을 그려 넣어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보듯 이야기의 줄거리를 쉽게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오히려 글이 없다보니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르게 아이와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감기 걸린 날
눈이 많이 온 겨울 어느 날, 엄마가 아이에게 오리털 파카를 사 준다. 자세히 보니 봉제선 밖으로 깃털 하나가 빠져나와 있다. 누구나 한번쯤 해 봤을 경험이다. 잠이 든 아이는 꿈에서 털이 없어 헐벗은 오리들을 만난다. 오리들은 너무 춥다며 옷속에 든 깃털을 달라고 하고, 아이는 옷 속에서 깃털을 꺼내 오리들에게 심어 준다. 그리고 함께 썰매도 타고 숨바꼭질도 하며 신나게 논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감기에 걸렸다. 엄마는 이불을 안 덮어서라고 하지만 아이는 믿고 있다. 내 깃털을 오리들에게 다 주어서 그렇다고.
겨울 하늘의 달처럼 아이들의 판단은 더 선명하다. 좋은 것은 좋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는 핑계일 뿐이다.
오리털 파카를 엄마가 사준 날, 아이는 그저 예쁘고 따뜻하니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 털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다. 오리에게서 왔다면 털이 뽑힌 오리는 기분이 어떨까 걱정이 든다. '나는 따뜻해서 좋은데 오리들은 춥지 않을까?' 왠지 미안하고 죄지은 기분이다.
아이들은 직관에 의해 움직인다. 부모들은 말로 설명하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라는건지 난처해 한다.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건데 이유를 생각하라니 머리만 복잡하다. 부모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 왜 생각이 없나 싶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언어와 논리적 사고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을 뿐 판단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말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이다. 하지만 화려한 말로 본질을 가려서는 곤란하다. 아이들에겐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아이들 말을 애들 생각이라며 애써 무시하는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날것의 진실이 두려워진다. 결국 부끄러워할 사람은 많은 경우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이다.
이 글은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의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에서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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